교회 소개
뉴욕 나사렛 중앙 교회
The Central Korean Church of the Nazarene
뉴욕 나사렛중앙교회는 미국성결교단 (Church of the Nazarene)의 소속 교회입니다.
나사렛 교단은 전 세계 164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교단으로서 감리교 선구자인 요한 웨슬레의 성결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결교단입니다. 1908년에 창립, 현재 전 세계 164개 지역의 30,000개 이상의 교회에서 약 250만 명의 회원이 예배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성결교단의 최우선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전파하고 보존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나사렛인의 신앙공동선언
나사렛성결교회의 교리와 치리에 따라 자의로 결합되어 거룩한 성도의 교제와 죄인의 회개와 신자의 완전성결과 거룩 속에서의 성장과 전 인류를 향한 복음 전파와 더불어 초대 신약 교회에 나타난 단순성과 영적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신앙공동선언
교회 회원권에 대한 개인의 권리와 특전은 그가 중생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필수적인 신앙의 고백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신앙 선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2.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다.
3. 사람은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러므로 악에 기울어진다고 믿는다.
4.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소망 없이 영원히 잃어버리게 됨을 믿는다.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며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되고 거듭나며 죄의 지배 하에서 구원 받는 것을 믿는다.
6. 믿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중생하고 뒤이어 온전히 성결하게 되어야 함을 믿는다.
7. 거듭난 것과 신자의 완전성결 됨을 성령께서 증거해 주심을 믿는다.
8. 우리 주께서 재림하심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을 믿는다.
북미주 나사렛교회의 역사
미국에 한인 이민 사회의 시작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이후, 1950년 6.25 한국 전쟁 발발까지 북미주 한인 교포의 규모와 힘은 미미한 상황이었다. 실제적인 이주는 1950년 한국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이민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쟁 후, 전쟁 고아와 군인 유가족, 미망인 1,600명이 미국으로 입국하여 두 번째로 큰 이민 홍수를 이루었다. 이민국 1980년 센서스에 따르면, 354,529명에 이르는 급성장을 이루었다.[1] 특별히 로스앤젤레스 (LA, CA) 공항은 한인 이민자 입국의 대관문이었다.
특별히 사회학자이며 훌러 신학 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회 성장학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 (Peter Wagner) 박사는 1985년 로스앤젤레스 항은 한국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입국하는 최대의 항구였으며, 한인 이민 인구 증가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였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한인 이민자들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고, 다운타운의 낡은 가게들과 무너진 건물들을 사들여 청소하고 리모델링하고, 증축하며 소규모 비즈니스를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흑인들과 멕시칸들의 저소득층 시민들의 가난과 빈곤, 마약, 갱으로 파괴되었던 게토(Ghetto) 다운타운의 지역들을 변화시켜, 퇴락한 도시들을 아름답고 말끔한 도시로 변화시켰다. 와그너 교수는 한인 이민자들이 가는 도시는 구석구석마다 깨끗해지며 아름답게 단정된 새 도시로 변화된다며, 한인들의 근면, 청결함을 칭찬했다. 이것을 통해 한인 인파들이 밀집하여 오늘날 한인타운으로 형성되어 성장하였다.
첫 이민자인 한인들은 전혀 다른 언어와 낯선 문화와 장벽을 부딪치며, 사업터를 일구고, 직업을 구하며,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실제로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직장, 쇼셜시큐러티(한국의 주민번호), 운전면허 취득, 자녀교육, 은행 계좌 오픈, 세금과 보험, 필수품 구매, 병원 의료시설 등의 정보와 필요는 한인 교회 공동체로부터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한인 교회 목회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머슴처럼 온갖 심부름을 다하며, 교회 개척을 위해 공항, 학교, 은행 등 닥치는대로 도와야 했다. 미국 목사는 머슴 목사란 별명이 그때 생겼다.
그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어 그 수가 증가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특별히 한인 나사렛 교회들도 1970년대 초부터 이민 가족들과 유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인 유학생들은 한국음식과 외로움으로 인한 친교가 필요해서 찾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인들 밀집 인구 증가와 함께 중소기업도 증가했으며, 한인타운도 비례하여 성장했다. 동시에 남가주 한인 크리스천 커뮤니티(공동체)도 급성장하여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그리고 침례교회들도 성장하여 20년간 600개 이상의 교회들로 성장했다.
북미주 한인 나사렛 성결교회의 시작
북미주에서도 한인 나사렛 성결교회가 1970년대 한인들이 미국으로 대 이민을 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비록 이방인인 한인으로서 많은 어려움과 장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주에 한인 나사렛 성결교회는 서부, 중부, 동부로 확대되어 갔다. 이 장에서는 처음 시작한 간략한 역사만 다루고 다음 장에서 각 지방회별로 개교회들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북미주 안에 시작된 첫 한인 교회는 누님의 초청으로 북가주에 이민 온 박노수 목사(1966년도에 성결교 목사 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박노수 목사는 서울 신대 동문인 나사렛 교단의 황성택 목사를 통해 나사렛 교단에 들어왔고, 그 당시 북가주 지방의 연회 감독인 Dr. E. E. Zachary과 함께 1970년 5월 20일에 “산호세 나사렛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1997년 노스 할리우드에서 한인 목회자 모임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을 섬겼다. 박노수 목사는 한 교회에서 33년의 사역을 마친 후 2003년 7월 20일에 은퇴했다. 황성택 목사는 1951년 보이스카웃 대표였던 나사렛 교단의 원로이신 김영백 목사를 만나 나사렛 교단을 알게 되었다. 1969년 Simpson 대학에 유학 와 1971년 4월에 졸업한 황성택 목사는 1971년 6월 4일에 San Leandro(2301 Miramar Ave. San Leandro, CA 94578)에서 샌 리안드로 나사렛 교회를 개척했다. 두 번째 개척은 1985년에 새크라멘토 나사렛 교회(현 벧엘 나사렛 교회, 윤호준 목사 시무)를 개척했으며, 세 번째는 훼어휠드 나사렛 교회를 1988년 6월에 개척했으며, 마지막으로 1991년 3월 17일에 발레호 한인 교회(현 배영수 목사 시무)를 개척한 후 2002년에 은퇴했다.
중부 지역은 김종수 목사가 1974년에 시카고에 나사렛 교회를 개척한 것이 시작이며, 이듬해인 1975년에 전윤규 목사가 오클라호마 지역에 개척한 “오클라호마 제일 한인 나사렛 교회”가 두 번째 한인 나사렛 교회이다. 전윤규 목사는 한국에서 오은수(Dr. Donald D. Owens) 선교사의 통역관이었으며, 나사렛 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중, 오클라호마 소재 베다니 나사렛 대학교(현, Southern Nazarene University-SNU)에 유학차 도미하여 학업과 함께 한인 나사렛 교회를 1975년에 개척했다. 세 번째 개척은 정윤걸 목사에 의해 1979년에 루이지애나주에 세워진 레드리버 한인 교회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오정환 목사로, 1983년에 달라스에 가족들과 이민을 와, 북동 텍사스 연회(North East Texas District of the Nazarene)의 도움을 받아 달라스 한인 나사렛교회를 개척했다.
남가주 지역은 1971년 2월 14일에 로스앤젤레스(Los Angles)에서 한수근 목사에 의해 개척된 교회로 출발했다. 그는 타 교단 소속 목회자로서 나사렛 제일 교회 건물을 빌려 열 네 명의 교인들과 함께 개척을 했으며, 후에 나사렛 교단으로 들어와 “LA 제일 한인 나사렛 교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목회를 했다. 당시 “LA 한인 제일 나사렛 교회”는 남가주 지역의 전체 한인교회 중 스물아홉 번째로 시작된 한인 교회였으며, 4년 만에 15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다.[1] 두 번째 한인 나사렛 교회는 권구철목사가 1975년 제일 교회에서 개척했으며, 1986년까지 목회한 교회인데, 권 목사는 목회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다 후에 교회를 폐쇄하고 교단을 떠났다. 세 번째 교회는 1980년 초에 이봉환 목사가 West Chester(웨스트 체스터)에 개척했으나, 2년 후 개인 사정으로 사역을 마감했다. 네 번째 교회는 이영준 목사가 1981년 샌디에고 남쪽 출라 비스타(Chula Vista)에 개척한 시온 나사렛 교회이다. 이영준 목사가 1989년 샌 루이스 교포 나사렛 교회로 이적한 후, 1990부터 1996년까지 강영석 목사가 목회하였다.
동부에서의 시작은 이문구 목사가 1978년에 뉴욕 한인 교포교회를 설립하였고, 두 번째는 1982년에 최웅렬 목사가 후러싱 나사렛 교회를 개척했다. 세 번째는 이병홍 목사가 1983년 한국 기독교 성결 교단에서 목회하다가 뉴욕에 이민 와 태권도장 지하실에서 6명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송동석 목사가 이문주 목사와 함께 1985년에 스프링필드 제일 한인 나사렛 교회를 시작했으며, 2년 뒤에 이문주 목사가 그린필드에 개척을 나가 앰허스트 시온교회를 세웠다.
국제 나사렛교회의 역사
역사적 기독교와 웨슬리주의 성결의 유업
유일한 성경신앙
나사렛교회는 성결의 메시지에 대한 초유의 우주적 사도 교회의 일원임을 자인해 오면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의 를 다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동 교단은 신구약 성서에기록되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곧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 역사가 사도 시대에는 물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믿는다.
'나사렛 사람'이라 함은 모든 시대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 받은 이 땅위의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된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런 뜻에서, 나사렛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 5세기 동안의 일현의 초교파적 기독교 신조들을 적절한 신앙의 표현들로 받아들인다. 나사렛교회는 완전성결의 교훈과 체험을 성례의 집행, 그리고 믿음과 행함의 동시적 강조를 통해 사도적인 사역을 육성하고 지속시키며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점에 있어서 사도적 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주의를 기울여 왔다.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 기독교 신앙은 과거의 여러가지 종교적 흐름 가운데 특히 18세기 웨슬레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우리 나라렛 교인들에게 전해져 왔다. 1730년대에 들어서면서영국 내에서 넓은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주로 영국 교회의 성직자였던 요한 웨슬레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의 지도하에 생겨났다. 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이 부흥 운동의 특징으로서, 평신도들의 복음 전파, 간증, 훈육, 그리고 열심 있는 제자들의 각종 모임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societies','classes', 'bands'등이 있었다.
영적 부흥 운동의 효시들로는 독일 경건주의와 그 창시자라고 할만한 야곱 스페너(Jacob Spener),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목회자이면서 신학자인 요나단 에드위즈(Jonathan Edwards)를 중심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각성 운동을 들 수 있다.
웨슬레의 위대한 부흥 운동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크게 세가지로 특징을 지을 수 있는데. 믿음안에서 은혜로 거듭나는 거듭남, 역시 믿음안에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결, 그리고 은혜의 확증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바로 그 것이다.
요한 웨슬레의 고유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서 이 땅위에서의 완전 성결에 대한 강조점을 들 수 있는데, 웨슬레는 이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해 준비한 은혜로운 계획 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러한 웨슬레의 신학적 강조점들이 영국 감리 교회의 초기 선교활동 에 의해 세계 전역에 퍼져 나가기에 시작했다. 북미대륙에는 "대륙을 개혁하고 대륙 온 땅에 성경이 가르치는 성결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명백한 목적을 띠고 1784년 영국 성공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의 성결운동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강조하는 새로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미국 동부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감리교 성직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지침서??(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의 최초 편집자인 디모데 메릿트(Timothy Merritt)가 성결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뉴욕의 포베 파머(Phoebe Palmer)로서, 그녀는 성결 운동의 촉진을 위한 화요일 기도 모임의 인도자였다.
그런데 감리교 감독들과 교육가들, 그리고 다른 많은 교역자들이 성결의 체험을 갈망하며 최초의 여성 집회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도 모임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파머 여사는 무려 40여 년간이나 대중 집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각종 저서의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특별히 "성결의 지침서"(Guide to Holiness)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책의 편집인 역할을 맡아 성결 운동을 더욱 확산시켜 갔다.
성결 운동은 감리교의 테두리 밖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찰스 지피니(Charles G. Finney)와 아사 마한(Asa Mahan)은 둘 다 오벌린(Oberlin) 대학 출신으로서, 당시 부흥 강사였던 윌리엄 보드맨(William Boardman)처럼 장로교와 회중교단 내에서 새롭게 성결을 강조하고 나섰다. 침례교 부흥 강사인 에이. 비. 얼(A. B. Earle)은 자신이 속한 교단 내에서 성결 운동을 지도하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나 위톨(Hannah Whitall)은 퀘이커 교도이면서 또한 인기 있는 성결운동가로서 1875년에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The christian's Secret of a Happy Life)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오늘날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고전이 되다시피 하였다.
1867년에 감리교회의 목사인 존 에이 우드(John A. Wood)와 존 인스킵(John Inskip) 그리고 그 외 몇몇 사람들이 뉴저지 주의 바인랜드(Vineland)에서 처음으로 연속 전국 캠프 집회 연합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주로 전국 성결 연합회(현재는그리스도인 성결 연합회)로 알려져 왔다.
20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이 연합회는 미국 전역에서 실시되는 각종 성결 운동을 후원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 및 지방 단위의 성결 연합회들이 출현하였고, 성결 교단의 주요 출판사들이 각종 간행물과 서적들을 앞 다투어 출판하였다.
성결 운동을 주창한 자들의 주장은 웨슬레 감리교회(1843)와 자유 감리교회(1860), 그리고 영국의 구세군(1865) 등을 창설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880년대에는 독특한 신생 성결 교단들이 출현하였는데 인디아나의 앤더슨(Anderson) 파로 분류되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결교(Holiness) 파로 분류되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 외 기존의 오래 된 전통 교단들도 성결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완전성결에 관한 한 웨슬레의 성결론을 채택한 메노나이트파(Mennonites)와, 형제 교회(Brethren), 그리고 동료애를 표방하는 프렌드교회(Friends) 등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교회의 형제파(Brethren)와 복음주의 프렌드 동맹(Evangelical Friends Alliance)은 이른바 영적 전통의 혁신을 가져온 본보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그룹연합
1890년대에는 새로운 조류의 독립 성결 단체들이 일어났는데 독립 교회들과 도시선교 단체, 가정 구호단(rescue homes), 그리고 각종 선교 및 전도 협의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전국 규모의 성결교회로 연합하기를 소원하였으며, 이 일이 동기가 되어 현재의 나사렛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The association of Pentecostal Church of America)
1897년 7월 21일 회원 51명에 힐러리(F. A. Hillery) 목사를 목회자로 하는 민중 복음 교회(People's Evangelical Church)가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주에서 조직되었다. 그 이듬해 메사추세스(Massachusetts) 주의 린(Lynn)에서 데이비스(C. Howard Davis) 목사를 목회자로 하여 선교 교회(Mission Church)가 조직되었다.
1890년 1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이 교회 대표들과 다른 독립 성결 단체들의 대표들이 메사추세스 주의 록(Rock)에 모여 로드아일랜드와 뉴햄프셔(New Hampshire), 그리고 메사추세스 주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복음주의 중앙 성결 연합회(Central Evangelical Holiness Association)를 조직하였다.
1894년 1월에는 사업가 후플(W. H. Hoople)이 브룩쿨린 전도단(Brooklyn mission)을 설치하였는데, 그 이듬해 5월에 유티카 애비뉴 오순절 성막 교회(Utica Avenue Pentecostal Tabernacle)로 재조직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 연말까지는
벳포오드 애비뉴 오순절 교회(Bedford Avenue Pentecostal Church)와 임마누엘 오순절 성막 교회가 조직되었다. 1895년 12월에는 이들 세 교회의 대표들이 교회 헌법을 채택하고 교회의 개요와 부칙 등을 채택하여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를 형성하였다.
1896년 11월 12일에 뉴욕 브룩클린 시에서 복음주의 중앙 성결 연합회(the Central Evangelical Holiness Association)와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의 합동 위원회가 소집되어 통합 계획을 모색하였고 그 통합 단체명은 그대로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라 하기로 합의했다. 이 연합회의 주요 인사들로는 레이놀즈(Hiram F. Reynolds), 호슬레(H. B. Hosley), 데이비스(C. Howard Davis), 후플(William Howard Hoople), 그리고 보다 후기에 참여한 엔겔(E. E. Angell) 등이 있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원래 평신도 설교가들이었으나 후에 교회의 요청에 따라 목사로 안수를 받기도 하였다. 이 연합회의 결정적인 임무는 선교하는 일이었으며, 선교 총무였던 레이놀즈(Hiram F. Reynolds)의 지도 하에 인도의 케이프 버데 아일랜드(Cape Verde Islands)와 여러 다른 지역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희망찬 포부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뷸라 크리스천(The Beulah Christian)이라는 책자를 협회의 공식 간행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of Christ)
1894년 7월에 테네시(Tennessee) 주의 밀란(Milan)이라는 곳에서 해리스(R. L. Harris) 목사가 임종 직전에 신약 그리스도의 교회(New Testament Church of Christ)를 조직하였다. 그 후 해리스(R. L. Harris) 목사의 미망인이었던 케이글(Mary Lee Cagle) 여사가 남편의 일을 계속 하였으며 동 교단의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이 교회는 정치 형태로는 회중 교회로써 알칸산스(Arkansas) 주와 텍사스(Texas) 주 서북 지역에 두루 퍼져있었고, 교인들은 주로 알라바마(Alabama) 주와 미주리(Missouri) 주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케이글(Mary Cagle) 여사와 그녀의 협력자 쉭스(E. J. Sheeks) 여사는 1899년에 최초의 안수 후보자들 가운데 섞여 안수를 받았다.
1888년에 들어서면서 텍사스에는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에서 온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 목사와 데니스 로저스(Dennis Rogers) 목사에 의하여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라는 이름을 가진 소수 회중의 교회들이 조직되었다.
1901년 저니간(Charles B. Jernigan) 목사에 의하여 텍사스 주 반알스타인(VanAlstyne)에 최초의 독립 성결교회(Independent Holiness Church)가 조직되었으며, 창립 초기부터 체프만(James B. Chapman) 목사가 이 교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교단은 빠른 속도로 부흥 발전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데니스 로저스 목사가 이끈 교회들이 독립 성결교회에 가입하였다. 이윽고 1904년 11월에는 그리스도 신약 교회와 독립 성결교회의 대표들이 텍사스 주의 라이싱 스타(Rising Star)에 모여 통합 원칙에 합의하였으며 장정을 제정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성결교회(Holiness Church of Christ)라는 교단 명칭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통합은 그 이듬해 텍사스 주의 파일럿 포인트(Pilot Point)에서 열린 중앙 대표 협의회에서 완성을 보았다. 아울러 공식 간행물"성결의 복음"(The Holiness Evangel)을 교단의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그 외 교단 내의 대표 교역자들로는 피셔(William E. Fisher), 스캇(J. D. Scott), 업처치(J. T. Upchurch)를 들 수 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로는 쉭스(Edwin H. Sheeks), 알 밋첨(R. B. Mitchum), 다니 밋첨(Donie Mitchum)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의 교단 내의 여러 지도자들은 텍사스 성결 연합회(the Holiness Association of Texas)에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텍사스 주 그린빌(Greenville)에 인접한 브니엘(Peniel) 대학을 후원하기 위한 초교파 단체였다.
그 연합회는 또한 남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성결 운동 홍보지인 '오순절 대변자'(Pentecostal Advocate)를 후원하였는데, 그것은 1910년에 나사렛 교단의 기관지가 되었다. 그 연합회의 주요 인물들로는 디저넷(E. C. DeJernett) 목사와 평신도였던 맥코넬(C. A. McConnell) 씨를 들 수 있다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
1895년 10월에 브릿지(Phineas F. Bresee) 목사와 의사였던 위드니(Joseph P. Widney) 씨가 각각 자신들의 가족과 볼드윈(Alice P. Baldwin), 개이(Leslie F. Gay), 놋트 부처(W. S. and Lucy P. Knott), 맥키(C. E. McKee) 씨 등을 포함하여 약 100명으로 구성된 나사렛성결교회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조직하였다. 표면적인 견지에서 그들은 이 교회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완전성결의 실재를 전파하는 최초의 교단임을 천명하였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성결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 스스로 특별히 이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배 처소에 대한 불필요한 단장이나 장식물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대변하지 못하며 오히려 세속적인 생각을 반영한다고 보았으며, 자신들의 시간과 물질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위한 구제 사역을 위해 소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 같은 취지 하에서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일반 규약과 신조, 제한적 감독권에 기초한 치리, 집사 임명 절차 및 목사안수 과정 그리고 예식 절차 등을 채택하였으며, 이를 1898년 초에 교회 장정으로 출판하였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The Nazarene)이라는 간행지를 발간하였고 후에 '나사렛 사절'(The Nazarene Messenger)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나사렛성결교회는 주로 서부 해안을 끼고 퍼져 나갔는데 로키 산맥의 동부로부터 일리노이(Illinois) 주에 이르기까지 각 곳에 교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새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한 목사들 가운데는 브라운(H. D. Brown), 셰퍼드(W. E. Shepard), 루쓰(C. W. Ruth), 켄트(L. B. Kent), 라이드(Isaiah Reid), 크레이턴(J. B. Creighton), 코넬(C. E. Cornell), 피어스(Robert Pierce), 그리고 윌슨(W. C. Wilson) 등이 있다. 그리고 새 교회에서 처음으로 안수 받은 이들로는 위드니(Joseph P. Widney), 웰레이스 부처(Elsie and DeLance Wallace), 놋트(Lucy P. Knott) 그리고 걸빈(E. A. Girvin) 등이다. 브리스(Phineas F. Bresee) 목사는 38년간의 다양한 목회경력, 즉 목회자, 감독, 편집자, 대학이사 그리고 감리교 캠프 집회의 설교자로서의 경험과 사람을 끄는 그의 독특한 인품때문에 여러 성결 교단들을 국가적 규모의 단체로 통합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통합년도
1907 -1908. 나사렛성결교회의 부 중앙감독으로서 웨슬리안 계통의 성결 운동 단체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쌓아온 루쓰(C. W. Ruth) 목사에 의하여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The Association of Pentecostal Churches of America)와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 그리고 그리스도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of Christ)가 서로 연합하게 되었다.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와 나사렛성결교회 대표들이 1907년 10월 10일-17일까지 시카고에서 중앙총회를 가졌는데, 두 그룹의 대표들은 감독의 권한과 개교회의 독립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교회의 치리 형태에 합의를 보았다. 감독들은 기존 교회를 육성하고 격려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권한은 결코 자립 교회의 의결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중앙총회는 양 단체의 이름을 따서 통합 교단의 명칭을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The Pentecostal Church of the Nazarene)라고 하였다.
초대 중앙감독으로는 브릿지(Phineas F. Bresee) 목사와 레이놀즈(Hiram F. Reynolds) 목사가 피선되었으며, 그리스도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연회의 업무에 시종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또 다른 두 건의 교단 가입이 있었다. 1908년 4월에는 브릿지(P. F. Bresee) 목사가 텍사스 주의 브니엘(Peniel)에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를 조직하여 텍사스 성결 연합외의 주요 인물들을 그리로 인도함으로써 다른 교인들로 하여금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9월에는 그리스도인 성결교회(the Holiness Christian Church)의 펜실베이니아 연회가 해당 교단의 중앙총회의 승인 하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트럼보(H. G. Trumbaur) 목사의 인도 하에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였다.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의 제2차 중앙총회는 텍사스 주 파일럿 포인트(Pilot Point, Tex)에서 1908년 10월 8일 -14일까지 그리스도 성결교회의 중앙 협의회와 연합 회의로 모였다. 양자간의 오랜 통합 준비 기간이 "두 교회의 통합을 이제 완성하기로 하자는 밋첨(R. B. Mitchum)의 동의안에 대해 루쓰(C. W. Ruth)가 제청함으로써 10월 13일 토요일 오전에 종결되었다.
또한 여러 사람이 동의안에 찬성하였다. 브릿지(Phineas Bresee) 목사는 이 동의안의 가결을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오전 10시 40분경에 열의에 찬 분위기 하에 만장일치의 거수투표로 채택되었다.
교단 이름 변경
1919년 중앙총회는 35개 지방 총회의 청원에 따라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라고 공식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Pentecostal)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의미들 때문이었다.
추가가입
1908년 이후 여러 다른 단체들이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게 되었다.